어떻게 배우며 살 것인가?
이 책에 담긴 최재천 교수와 안희경 저널리스트 간의 대화록은 두 가지 관점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하나는 “개인 차원에서의 학습” 이고, 둘째는 “사회 차원에서의 교육” 이다. 사회 차원에서의 교육도 겉으로는 “어떻게 가르칠까?” 의 미래적 고민을 담지만, 그렇다고 명확한 교수법을 딱 가이드라인을 세울 수는 없다. 하지만 어느정도 적절한 방법은 있을 수 있다. 그 중 저자가 추구하는 방법은 여러 사람의 생각과 경험이 한데 섞여, 어울려 학습하는 현장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올바른 교육법도 교육 받는 주체가 “바른 학습” 이 가능하다는 가정에서, 어떻게 그것을 지속할지의 해답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돌고 돌아 기저에 깔리는 가장 근본 질문은 “내가 어떻게 배우며 살아가야 할까?” 의 고민이다. 책은 이 질문의 답을 저자가 살아온 경험을 통해 담화 형태로 풀어낸다. 배우는 학자로서, 또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저자가 생각하는 “공부” 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그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누구나 꽃 피울 자격이 있다.
교수의 교육 철학은 시골 분교 일화로 알 수 있다. 한 달에 한 번 어느 시골 분교에 가고선, 그 곳의 아이들과 놀 때 주제를 정해놓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풀 한 포기를 보더라도, 누구나 이것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도록 가이드를 한다. 여기서는 소외되지 사람이 없다. 어울려 탐구하는 교육의 현장을 볼 수 있다. 학교라는 틀에서 꼭 “배운다"라는 느낌이 들어야만 진정한 학습인가? 놀면서 배울수는 없을까? 즉슨, 배운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배울수는 없을까?. 교수가 대학교에서 가르치던 시절, 스스로 궁금하였던 질문의 답이다.
그래서 최재천 교수는 아이를 무언가를 수행하는 역할자로 키우는 교육을 거부한다. 스스로 세상을 보고 습득하도록 셀프 모티베이션을 부여하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라 말한다. 그렇게 최재천 교수와 같이 노는 (같이 공부하는) 아이들은 이따끔 더 새로운 걸 찾아서 교수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럴때는 교수도 놀란다.
“나도 아이에게서 배웁니다.”
경직을 가지지 말자. 그러나 몰입은 한다.
최재천 교수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왜일까? 교수는 스스로 문제였다고 한다. 해야할 일의 가장 중심(Core)을 하지 않고, 자꾸 가지치듯 곁다리로 새고 주변을 둘러보다 시간을 허비하였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구멍이 숭숭 뚫린 삶을 살았다고 하여도, 깊이 이해하고 대상의 체계를 잡아내는 능력을 길렀다고 말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먼저 모든 걸 다 해야한다는 경직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 이것저것 손대도 괜찮다. 하지만 깊숙히 파고드는 몰입은 중요하다. 처음에는 구조가 엉성하더라도, 그 중 가장 깊게 익힌 것이 든든한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최재천 교수가 말하는 공부의 정의는 여기로부터 나온다. “개인이 호기심을 갖는 과정을 통해 파고드는 것”.
그래서 무엇이든 한참하면 시간이 지나 엉성한 곳들이 메워지므로 두려워말라고 한다. 학문이란 독자적이지 않고, 여러 분야가 연결되기 때문이다. 공부를 통해 가장 깊숙히 이해한 도구를 가지고, 엉성하게 익힌 것을 체계화한다. 나는 이 관계가 인식과 인지의 차이로 이해한다. 경험은 (=공부) 인식의 과정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경험을 활용하여, 서로 다른 경험으로부터 얻은 인식을 체계화 하는 것은 인지이다. 우리는 이 인지를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판단한다.
가장 창의적인 생각은 혼자서 몰입한 시간이 만든다.
안희경 저널리스트는 최재천 교수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그토록 많은 글을 쓸 수 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교수의 대답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다. 일(Work)이야 대부분 시간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과정이지만, 최종 결과물은 내가 고민하고 조사한 시간을 거쳐서 산출된다. 이 혼자만의 과정에서 가장 창의성이 발현된다.
사실 이 창의성이라 함은 대단한 천재적 발상이 아니다. 조직이 가지는 논리와 합의에서 조금만 튀는 생각을 해도 충분하다. 이따끔 완전히 엉뚱한 말을 하는 사람이 천재일수는 있으나, 그것이 좋은 결과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다. 중요한 점은 내가 속한 조직의 표준적 생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 결을 잘 타야한다. 물론 이 결은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고, 행운이 따라야할 수도 있다고 저자 스스로 말한다.
독서는 일이다. (=빡세게 한다.)
마음 비우려고 책을 읽는다고 하여, 말랑한 책만 보는 것은 사고의 가소성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지 못한다. (가소성 개념이 꼭 우리 뇌가 발전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최재천 교수는 “좋은 독서” 를 하기 위해 다음의 조언을 한다.
-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되는 책은 보지 않는다.
- 책은 기획하며 읽는다.
- 친숙하고, 쉬운 것만 보지 않는다 → 잘 모르고, 어려운 책에 도전한다.
- 여러 분야를 넘나들어 이해의 성숙도를 높인다. 독서는 모르는 것을 익히는 “일” 이어야 한다.
- 현실적인 이야기에 관하여…
100세 시대에, 10~20대에 공부한 것으로 우려먹는 시대가 아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학습해야 도태되지 않는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어른에게 새로운 것을 배울 수단은 많지 않다. 그나마 가장 간단하고 쉬운 접근법이 독서이다. 이렇다보니 생존이 걸린 삶에서, 독서를 단순 취미로 하기에는 현실이 낭만적이지 않다.
- 무엇을 어떻게 읽을까?
- 간단하다. 많이 읽고 관찰한다 (=생각한다).
- 책의 편식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안 보는 것보다는 낫다.
- 무엇을 읽든, “왜” 읽는지 스스로 목적을 명확히 한다.
- 세상의 모든 활동은 “쓰기"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쓰기” 실력은 “읽기” 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많이 읽고, 많이 고민하고, 많이 써본다.
우리는 쓰기와 말하기를 통해 다른 세상(다른 개인)과 소통한다. 이 과정에서 실수할 수 있다. 그럴 땐 뻔뻔하고 당당해진다. 실수와 잘못은 인정하면 된다. 동시에 우리 사회도 그것을 용납하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 또 무엇보다 사람을 나무라지 않는다. 당당하게 말하고, 겁먹지 말고 들이댄다. 이렇게 사회 속의 나가 다른 사람이랑 소통하고 섞인다. 이 과정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은 아래와 같다.
- 전체를 보고,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는 힘
- 위 과정을 통해 개인이 변한다. 그리고 개인의 변화로 사회가 변한다.
- “나 하나가 무슨…”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
서론 속의 결론
나는 책의 서론에서 결론을 찾았다. 생태학자로서의 최재천 교수는 자연의 가장 큰 오해를 설명한다. 자연은 무한 경쟁, 적자 생존의 현장이 아니라, 서로 손을 잡은 수많은 공생 관계가 자원을 독차지하려는 독불 장군을 몰아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관점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결코 홀로서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같이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한다. 이를 따르는 것이 자연 섭리대로 돌아가는 것이고, 공부는 결국 나만 잘 살자는 목적에서 기인하는 행동이 아니다. 배워서 남 주는 것은 내가 속한 조직과 사회를 발전시키는 행위이다. 그렇게 수준이 올라간 환경에서 나에게 돌아오는 보상의 기댓값이 커진다. 이 선순환 구조를 완성하기 위해 각자 개인은 올바른 공부를 해야한다. 결론적으로 “이타적 이기주의” 의 구체화된 행동이 공부인 셈이다.